-- 2014.12월 모임에서 나눴던 마알씀 --


요첫3:16이이 구절이 안티오크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 마땅하니라. (안티오크판' 요일 3:16)


잉글마알 'life'를 안티오크판' 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한글판 성경들이 '생명/목숨'으로 뒤쳤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셨다는, 인류 역사에 가장 깊은 인상을 심은 사건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life'를 '목숨(생명)'으로 뒤쳐 왔고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다음에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 마땅하니라.(안티오크판)”라고 하는 마알씀으로 이어지면서 조금 헛갈립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로서 보통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요즈음 같이 평화로운 때에는 마알입니다. 더욱이 다음에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더욱 이상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자기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안티오크판' 요일3:17)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 마땅하니,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을 닫아 버리면 안 된다는 마알씀입니다. 다른 이의 궁핍함에 대해서 마음을 닫지 않고 넉넉히 도울지라도 생명까지 내어놓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티오크판*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한글판 성경들은 이 두 구절이 어색하게 이어집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life'는 우리마알로 목숨일 수도 있고 사앎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마알씀이 “생명(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사앎을 내려놓는(lay down)”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의 첫 번째 여느 글월 (요첫) 3:16~17


Hereby perceive we the love of God, because he laid down his life for us: and we ought to lay down our lives for the brethren.
But whoso hath this world's good, and seeth his brother have need, and shutteth up his bowels of compassion from him, how dwelleth the love of God in him? (KJV)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림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사앎을 내려놓으셨기 때문이외다: 이에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 사앎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외다. 그런데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 형제의 필요를 보고도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닫아 버리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머물겠소이까?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사앎을 내려놓는(lay down one's life) 것은,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버리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만이라면 나날사알이는 형제들과 상관 없이 마지막에 목숨을 버리는 것만 형제들을 위해서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사앎을 내려놓는 것이라면, 나날사알이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한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도 형제들을 위한 것이란 마알입니다(롬14:7~8). 우리 주'님이 그렇게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오온 사앎을 내려놓으셨고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