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1397년~1450년(조선, 태조6년~세종32년)까지, 쉰세 해를 살았음.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서, 주후1418년 스물두 살부터 1450년 쉰네 살까지 서른두 해 동안 조선·을 다스렸음.

이름

성씨는 이·, 본 이름(휘)은 도·이다. 혼인 뒤 불리던 또이름(자)은 원정· 죽은 뒤의 또이름(시호)은 장헌· 기림이름(묘호)은 세종·이다. "세종" 이란, 공덕이 높았던 임금이 죽으면 그 공덕을 기리어 붙이는 기림이름이다. 그러므로 임금 세종·의 온 이름은 이 도· 이 원정· 이 장헌· 들이되 으뜸되는 온 이름은 이 도·이다.

간추림

세종· 이 도·는 태종 이 방원·과 원경왕후 민· 씨의 셋째 아들이며, 아내(비) 소헌왕후는 심 온·의 딸이다. 주후1408년(태종8년) 충녕군·, 1413년 충녕대군·으로 매겨졌다. 주후1418년(태종·18년) 6월, 큰형 양녕대군· 이 제·가 쫓겨난 세자의 자리에 매겨진 뒤, 태종· 이 방원·에게 물려받은 임금자리에 올랐다. 그 뒤로 정치, 과학,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버어렁에서 훌륭히 다스려 높은 겨레문화를 이루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으며, 다져 놓은 나라 힘을 바탕으로 나라땅을 넓혔다. 그의 수많은 훌륭한 일 가운데 으뜸은 겨레문화의 뼈대가 되어, 겨레와 언제까지나 함께하게 될 한글을 발명하여 펴낸 일이다. 그렇게 온 마음과 힘을 기울여 나라를 훌륭히 다스리다가 병이 깊어지자 주후1445년(세종·27년)에 대부분의 나랏일을 맏아들인 세자 이 향·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한글 연구에 온 마음과 힘을 쏟았다. 주후1450년(세종32년)에 이 향·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숨졌다.

 

정치

중앙집권의 틀을 꾸려가기 위하여 주후1420년(세종·2년)에 집현전·을 차리고 황 희· 맹 사성· 허 조· 들과 같은 곧고 깨끗한 이들을 뽑아 임금의 힘과 신하들의 힘을 잘 어울리도록 애써 의정부 의 힘이 홀로 지나치지 않도록 하였고,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키워 한창 나이의 깜냥이 뛰어난 학자들(변 계량· 신 숙주· 정 인지· 성 삼문· 최 항· 들)을 뽑아 정치 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따위를 하도록 하여 훌륭한 유교 정치를 이루었다.

학문, 한글

한글을 발명하면서 궁궐 안에 정음청(언문청)·을 세워 한글에 관계된 모든 일을 맡게 하였다. 오랫동안 왕자들과 공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스스로 고안하고 갈닦아 발명한 한글 (28)스물여덟 자를, 주후1446년(세종·28년) 음력 9월 상한(그레고리력 10월 상순)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내 놓았다. 사대주의에 절어 있던 시대에, 사대주의가 뼛속까지 들어찬 최 만리· 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서 널리 편 것이다. 그 15세기는 온 누리 여러 나라의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여느 백성이 알음이 많아지는 것을 싫어하던 때이다. 중궈·에 대한 사대주의에 푹 젖은 벼슬아치들이 많던 조선·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는 일됨새에 있었다. 이렇게 둘레가 꽉 막힌 답답한 역사성 속에서 임금 이 도·님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제대로 알음을 갖추게 할까 고민하여 인류 역사에 빛나는 한글을 발명해 펴낸 것이다. 그러고 정음청·을 통해 유교 전적, 음운서 따위의 한글책을 펴냈으며, 학문을 붇돋는데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따위의 온갖 책을 펴내게 하였다. 또한 이 천·에게 활자를 만들라 하여 경인자, 갑인자, 병진자 따위가 만들어졌는데, 그 가운데서 갑인자는 그 꼴이 아주 꼼꼼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

과학기술

주후1442년(세종·24년) 이 천· 장 영실·로 하여금 비내린 정도를 재는 측우기를 만들게 했는데, 이는 주후1639년 이탈리아·의 비.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차리고 과학기구를 갖추어 두도록 했고, 훈천의, 해시계, 물시계 따위 온갖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 담· 이 순지· 들을 시켜 중궈· 원나라·의 수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살펴보고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빌어 역서(달력)인 칠정산 내외편을 펴냈고, 천문, 역법, 의상 따위에 관한 알음을 뭉뚱그린 <제가역상집>을 이 순지·가 펴냈다.

종교

임금자리에 오른 첫 무렵에는 불교를 억눌러 5교 양종을 선종과 교종의 두 종으로 추려묶어 한 종에 열여덟 개 절만 두도록 하고 불도닦기(경행)를 막았으나, 끝 무렵에는 궁 안에 불당을 짓고 3년마다 (승과제도라 하는) 중들을 위한 시험, 불도닦기도 하도록 하는 따위로 왕실 불교로 북돋아 불교 일으킴에 도움을 주었다.

예술

음악에도 마음을 기울여 주후1425년 음악을 맡아보는 관청인 관습도감 을 차리고 박 연·으로 하여금 아악기를 고쳐,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모아 추리고 가지런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따위의 이름난 악곡을 지었다. 또한 실록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에 4대 사고(실록 도서관)를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 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경제, 사회

주후1436년 공법상정소를 차리고 각 도의 논밭을 기름진 정도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해보았으나 빈틈이 많았으므로 주후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고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를 차리고 풍흉에 따라 연분 9등법과 논밭의 기름진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에 따른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꾀했으며, 온 나라의 논밭을 20년 마다 살펴, 그 논밭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적어 두도록 했다(양안). 그리고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만들었고, 사형을 못하게 하는 따위로 주인의 종 다루는 법을 고쳤다.

밖으로

나라의 주권을 굳건히 함과 나라땅을 늘리는 일에 애쓴 보람을 들 수 있다. 명나라·에 처녀-바치기(처녀진헌)를 없애는 한편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예물(조공물)을 없애고 말과 베로 갈음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에 대해서는 무력과 구슬리는 방법을 아울러 썼는데, 두만강· 언저리의 여진·은 김 종서·로 하여 몰아내었고 여섯 개의 진을 세워 나라땅을 늘렸다. 압록강· 언저리의 여진·은 최 윤덕· 이 천· 들로 하여 몰아내었고, 네 개의 군을 차렸다. 이 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이르러 이 곳에 백성들이 옮겨가 살도록 하는 따위로 나라땅을 고르게 쓰도록 애썼다. 그리고 주후1419년(세종·1년) 이 종무·로 하여금 바다도둑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치게 했으며, 그 뒤 쓰시마섬·의 우두머리인 소 사다모리·가 용서를 빌고 장사트기를 애틋이 바라자, 주후1426년 동래·의 부산포· 웅천·의 제포· 울산·의 염포·를 열어주었다. 이후 쓰시마섬·에 사람 드나듦이 늘자 주후1443년 그들의 드나듦을 다루기 위하여 신 숙주·로 하여금 변 효문·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을 맺게 하여 (세견선이라 하는) 한 해 동안에 항구에 들어올 수 있는 그들의 배를 쉰 척으로 금쳤고, 그들이 (세사미·라 하는) 사갈 수 있는 쌀은 200섬으로 금치는 한편, 반드시 허락도장이 찍힌 종이를 지녀야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무덤:

영릉·이라 하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으나, 주후1469년(예종·1년)에 여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