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책*의 '머리 덮개'는 '머리털'인가 '쓰개'인가?



풀빛 글씨 위에 쥐돌이 더듬이를 올리고 조금 있으면 도움마알이 뜹니다.



1. 들머리

교회의 이끌꾼이노라며 스스로 앞장선 이들이 내세우는 '암이의 머리 덮기(고린도전서 11:1~16) 풀이'와 이에 대한 뭇 사람들의 되응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종교에 갇힌 이들 뿐 아니라 종교를 벗어나 제대로 마알씀을 따르노라 하는 무리 가운데서 적지 않은 이들이 '암이의 머리 덮기'를 가리트는 가르침 때문에 이 마알씀을 제대로 못 따르고 있습니다. 개신교 갈래의 모임과, 거기에서 나왔노라 하면서 개신교의 잘못된 제도(목사제도와 십일조 헌금 따위)와 내리버릇의 많은 것들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모임들은 이 마알씀을 제대로 따르려는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알기로 믿음을 지키려 많이 애쓰는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형제모임*과 몇 가정교회* 들은 이 마알씀을 꽤 따르고 있고, 심지어 로오마-카톨릭*(천주교)과 동방교회*, 이단의 몇 종파들조차 이 마알씀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도 오랫동안 잘못된 가르침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고, 요마적까지 이 일을 매듭 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 마알씀을 따르지 못하고 여러 해를 보내었으니 주*님께 참으로 죄송스러운 꼴됨새였습니다. 글쓴이는 이 마알씀을 밝히 알기 위해 주*님께 며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먹거름도 하고 모임에서 이 문제를 여러 차례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고맙게도 그러는 가운데 마알씀의 뜻이 모임 안에서 시나브로 또렷해졌습니다. 주*님께서 몇 차례 빛을 비춰 주셨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베푸심이 고맙고 고마울 뿐입니다. 그리하여 몇 해 전부터 풀어 적고자 했던 글을 이제야 씁니다.

먼저 마알씀을 읽고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몇 가지를 살펴 봅니다.

1. 이끌꾼과 그 가르침의 걸림돌

요한일서 2:27
But the anointing which ye have received of him abideth in you, and ye need not that any man teach you: but as the same anointing teacheth you of all things, and is truth, and is no lie, and even as it hath taught you, ye shall abide in him.
그러나 그대들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바름이 머무니 아무도 그대들을 가르칠 며리가 없고: 오직 그 기름바름이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되 그것은 참이요 거짓이 아니니 그대들을 가르친 대로 그분 안에 머물지외다.


교회의 이끌꾼이라는 이들의 가르침 가운데 그 끼침이 가장 큰 내세움은:


“바울*님이 마알하는 암이의 머리 덮개는 덮어 쓰는 덮천 따위가 아니라 그미 스스로의 머리털이다. 오롯한 거룩책*에 따르면 암이에게는 머리털이 덮개로 주어졌다는 15 절이 아퀴이므로 암이는 머리털만 길면 된다”


입니다. 이 같은 내세움은 마알씀의 흐름과 그 흐름 속에 담긴 뜻을 잘 살피지 않고 보면 그럴 듯합니다. 무엇보다 아퀴라는 15 절을 자꾸 눈여겨 보니 그 마알씀은 더욱 크고 무겁게 다가오고, 나머지 마알씀들은 그에 견주어 가볍게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머리 덮개의 참모습을 감추었다가 15 절에 가서야, 그것이 덮천이나 모자 따위의 쓰개가 아니라 그냥 머리털이었노라고 아퀴 짓고 알려 주었다는 내세움은 억지입니다. 참일, 그 앞 10 절까지 이미 알짜 마알씀은 매듭지어져 있습니다. 11~16 절은 앞에서 힘준 마알씀들을 지나치게 받아들일까 걱정스러워 조금 덧붙이는 마알씀과(11~12), 10 절까지의 마알씀을 제바탈조차 뒷받침하고 있지 않느냐며 다른 관점에서 앞 마알씀을 보태주는 마알씀, 그리고 그에 대한 도움마알(13~15), 마지막으로 마무리 마알씀(16)입니다. 15 절은 아퀴가 아닙니다. 암이는 주*님께 때 제 머리를 덮어야 한다(수이는 덮지 말아야 한다)는 11: 4~10 의 마알씀에서, 상식적이라면, 자연스럽게 덮어 쓰는 덮천을 떠올리게 될 터인데, 그것이 맞습니다. 덮거나 안 덮는 것이 머리털을 기르거나 짧게 하는 것이 아님은 또렷합니다. 이에 대한 터무니 및 풀이는 앞으로 차근차근 대 드립니다.

아무리 잘못된 가르침의 끼침이 크기로서니, 누리에 대해 죽었노라 마알씀을 따르겠노라며 자무질을 받은 이들 가운데 적지 아니한 이들이 왜 잘못된 풀이에 그리 쉽게 그럼하며, 위와 같은 가르침에 끼침을 받지 않은 이라면 다 알 수 있는 것, 곧 머리 덮개가 머리에 덮어 쓰는 쓰개임을 애써 아님하거나 모른 체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1:1~16 의 마알씀 풀이에 앞서 이 마알씀을 읽는 데에 걸림돌로 떠오르는 것들을 조금 더 추려 보았습니다. 그것은 위에 적은 '이끌꾼과 그 가르침의 걸림돌'에 더불어 비뚤어진 시대의 걸림돌, 뒤침의 걸림돌, 누리 사랑의 걸림돌 들입니다.

2. 비뚤어진 시대의 걸림돌

이 비뚤어지고 헝클어진 시대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는 이 시대의 누리가 끼치는 온갖 살스러운 끼침에 부대끼고 있습니다. 요즈음 시대는 암수이 다름을 그리 그럼하지 않는 흐름이면서 또 한 녘으로는 두동지게도 암수의 상품화가 그 끝을 모르고 치닫는 꼴됨새입니다. 로오마-카톨릭*이든 교파에 딸린 개신교든 어떤 이단 종파든, 종교의 굴레를 쓰고 있는 무리에는 비뚤어진 시대의 깨끗지 아니한 흐름이 결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서 나왔노라 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그 끼침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섞갈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 앞에는 이 비뚤어진 시대의 걸림돌들이 마구 널려 있습니다. 이 걸림돌들을 치우지 않고 거룩책*을 대한다면 이 걸림돌들에 걸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많이 비뚤어지고 흐려진 요즈음이 아니라 조금은 덜 비뚤어지고 조금은 더 맑았던 지난날에 목숨 걸고 마알씀을 따르던 옛 거룩님들은 이 마알씀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요즈음과는 달리 많은 암이들이 머리 덮개인 쓰개를 쓰고 다니던 그때의 일됨새 가운데서, 거나 앞마알 할 때 수이는 덮지 말고 암이는 덮으라는 마알씀을 대하면서, 과연 덮는 것을 쓰개가 아닌 머리털로 여길 수 있었을까요? 그러한 내세움이 있어서 서로 입씨름을 하고 가래 왔을까요? 그래서 어떤 암이들은 주*님께 때 쓰개를 쓰고 어떤 암이들은 안 쓰는 따위로, 교회가 그렇게 어지러웠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튀게 거룩책*을 읽거나 내세우거나 가래지 않았고, 마땅스럽게도 덮천을 덮어 쓰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누가 가랠 일로 여길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그러한 내리버릇은 없소이다. --고린도전서 11:16” 바울*님의 이 마알씀처럼 앞서 가신 거룩님들이 이 일을 두고 가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전에 이 걸판뒤쳐 올린 데이비드-버ㄹ코트*님의 다음 글이 조금은 터무니가 될 듯합니다. -- 《세기를 거쳐온 ㅋ흐리스토스람* 암이들의 머리 덮개》

11 장에서 암이의 머리를 덮으라는 마알씀이 긴 머리털로 머리통을 덮으라는 뜻이라면, 세월이 두 즈믄 해 가까이 흐르는 동안, 거의 모든 옛 거룩님들은 머리털을 기르라는 마알씀을, 쓰개인 덮천을 쓰라는 것으로 잘못 알고 써 왔다는 마알이 됩니다. 만일 저 자료들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며 참으로 믿는 거룩님들이, 쓰개가 아니라 하고 머리털만 고집하였다면,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서는 적어도 머리 덮개에 대한 가램은 끊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암이들 거의가 쓰개를 쓰고 다녔으니 마알입니다. 또한 그러한 가램이 끊임 없었다면, 더불어 그것은 여러 자료로 남게 되었을 터입니다. 좁고도 험한 믿음의 길을 앞서 가신, 거룩님들이 거짓된 종교 권위에 맞서던 일을 적은 자료에 머리 덮개 가램은 없는 듯합니다.

머리털이 곧 머리 덮개라는 가램은 적어도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롯했다 합니다. 두 즈믄 해 가까이 흘러 누리가 더욱 비뚤어진 뒤에야 이 마알씀의 수수께끼 답이 쓰개가 아니라 머리털임을 알게 되었고, 그로하여 믿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가램이 비롯되었다면 참으로 야릇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있는 이는 이 일을 눈여겨 깊이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3. 뒤침의 걸림돌

무엇보다도 15 절에서 “for a covering”이 어떤 뜻인지에 따라 뒤침이 다릅니다. “for”가 뜻이 넓기 때문에 마알씀의 온 흐름 속에서 뜻을 깨닫고 뒤쳐야 합니다. 그런데 어마마알잉글마알*인 사람도 거룩책*을 읽는 흐름에 따라서 이 “for a covering”를 달리 읽는 것 같습니다. 어마마알잉글마알*인 어떤 이는 저 덩이마알에서 “a”가 쓰인 것이 '덮개'가 머리털일 수 없는 터무니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아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1:15
But if a woman have long hair, it is a glory to her: for her hair is given her for a covering.
그러나 암이에게 긴 머리털이 있으면, 그것이 그미에게 빛쁨이니, 머리털이 [하나의 덮개로서 / 하나의 덮개 구실로서 / 하나의 덮개를 갈음하여] 그미에게 주어짐이외다.

그런데 뒤침이 틀림없는지 또렷하지 않은 15 절을 미리 붙박아 굳혀 놓고 앞 마알씀들을 이 글도막에 억지로 맞추면 마알씀의 뜻이 굽어지고 틀어지기 쉽습니다.

4. 누리 사랑의 걸림돌

누리를 사랑하면 주*님의 마알씀을 따르기 싫은 마음이 듭니다. 누리를 사랑하면서 더불어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더불어 누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마태복음 6:24, 누가복음 16:13). 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알씀을 따라야 할 때 누리의 눈치를 보며 누리와 손 잡으면서 그러한 지잇이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기 쉬우며, 아무리 또렷한 마알씀도, 본디 뜻과 달리 읽히거나 따르지 않아도 될 것같은 핑곗거리가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마알씀을 대할 때, 속에 누리를 사랑하는 마음, 누리를 좇고픈 마음이 끼어들어 마알씀을 굽어지게는 않는지 스스로를 잘 살펴야 합니다.

요한일서 2:15
Love not the world, neither the things that are in the world. If any man love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누리누리에 있는 것들이나 사랑 마시오. 누구든지 누리를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소이다.

누리 사랑은 모든 마알씀을 읽는 데에 걸림돌입니다. 물론 ' 암이의 머리 덮기'를 읽는 데에도 걸림돌입니다. 거룩책*에서 가르쳐 주신 마알씀, 하라 하신 마알씀이 많지만, 그 하라심들을 제 스스로도 얼마나 제대로 지키는지, 쉽게 판가름 못할 하라심이 많습니다. 오롯한 판가름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알씀을 따르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밝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하라심들이 몇 있습니다. 믿은 뒤에 받는 자무질, 거룩님들과 함께하는 주*님의 저녁잔치, 더불어 '암이의 머리 덮기'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암이의 머리 덮기'는 '수이의 머리 안 덮기'와 짝을 이루며 엮여 있습니다. 따라서 암이수이든 이 하라심을 밝히 헤아리고 따라야 하는 일임은 또렷합니다. 그런데 지금 누리에 속해 있는 여러 종교 교파들(의 이끌꾼)은 이 하라심을 없신여기거나 핑계를 대며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몇 이단들이 비슷하게 하고 있는 꼴됨새입니다. 그러다보니 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라심을 따르려 할 때 어쩌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그릇 헤아림 받지나 않을까, 또는 '남녀평등'이니 '여성해방'이니 하는 흐름 속에서 '여성차별'을 하는 것으로 그릇 헤아림 받지나 않을까 하며 누리의 눈치를 보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아예 이 마알씀을 달리 풀어 마음을 편히 하고자 하는 꾐에 넘어가 스스로를 속이기 쉽습니다. 누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 마알씀과 더불어 많은 마알씀들을 읽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마알씀을 제대로 헤아리고 따르려면 먼저 제 속에 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살로된 썩을 장막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누리의 꾐과 눈총과 으름짱에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늘 깨어서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바라야만 합니다. 누리에 대해 죽었음을 떠올려 누리의 눈치를 살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물 위를 잘 걷다가 눈 앞의 사나운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던 베드로*님처럼 눈 앞 누리의 사나운 으름짱을 두려워 하거나 꾐에 빠지면 안 됩니다. 누리에 눈길을 두고 그 눈치를 보게 되면 두려워하던 베드로*님이 물에 빠져 들었듯이 누리에, 그 악에 빠져 들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던 베드로*님 말고, 주*님만을 보고 물 위를 걷던 베드로*님을 본받아, 눈길은 주*님 계신 하늘에 두고 발길은 땅에서 거침없어야 합니다(마태복음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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