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한겨레

나라·고을·인민 두루 크게 한 번 삶을 추스르는 시절에 다다른 성싶다. 나아갈 바는 뚜렷하지만 피곤해하고 넉장거리를 부리는 이들도 적잖은 걸 보니 ‘바탕’ 생각이 난다.

바탕은 본디 ‘근본·밑감·바닥·바다·마당·판·거리’ 뜻으로 쓰였다. ‘바닥·바다’는 제살림을 차린 지 오랜데, 재미있는 건 단위말로 쓰이는 ‘바탕’이다. “소리 한 바탕 놀아보자!”면 판소리를 완창하는 걸 일컫는데, 춘향가 한 바탕이면 네댓 시간은 걸린다. 활 한 바탕이면 145미터 정도이니, 실전에서 적군이 100미터 남짓 유효 사거리에 들 때까지 시위를 잡고 기다리기가 무척 어려웠을 터이다. 국궁 활터에 가면 ‘설자리’와 ‘솔바탕’(과녁) 안에 절대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

그냥 판·마당이라면 춤 한 바탕, 놀음 한 바탕, 씨름 한 바탕으로 쓰이니 판·바탕·마당이 그게 그거다.

남는 건 역시 ‘사람됨·내림·피·정신’이다. 땅이나 옷감이나 밑빛깔은 눈에 보이되, 사람 ‘바탕’을 가리기는 쉽잖다. 출신·집안·신분 따위 사회계급적 처지·환경을 일컬으니 달리는 ‘난데·근지·근본’과 통한다. ‘본성·성질’을 ‘바탈’로 쓰는 이도 적잖다. 사물의 바탕을 이루는 기초·뼈대·틀로서는 나라의 제도·규범·양식 들이 있다.

편가르고 다투는 일은 시끄럽지만 늘 있는 일이고, 또 크게 한 번 추스르고 나면 바탕도 다져진다. 걱정거리는 바탕을 파 기둥을 흔들거나 ‘사대’로 바탕 문물을 흐리는 ‘지식 뚜쟁이들’이다.

바탕글·바닥글은 ‘지문’(地文) 대신 쓸 만한 말이다. 같은 ‘탕’자 돌림으로 ‘모탕’이 있다. 장작을 패거나 재목을 다듬을 때, 짐을 쌓을 때 바닥에 받치는 물건이다. ‘바탕·기둥’ 구실 하기도 어렵지만 이 ‘모탕’ 구실을 하기는 더 어렵다.

최인호/교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