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숨은 임자말(주어)을 반드시 찾아내어야 할 경우가 있다면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다. 주어가 꼭 드러나야 하는 외국말에서 연속되는 같은 말은 대명사가 받지만 우리말에서는 대부분 생략된다. 모든 언어는 같은 말의 되풀이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영어에서 명사의 줄임말인 대명사는 거듭 되풀이되어도 괜찮다. 그에 견주어 우리말은 되풀이를 피해 거의 앞에 나온 말을 생략하는 편이다.

다음은 파울 첼란이라는 도이치 시인이 쓴 시의 한 부분이다.

“태고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낮과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밤에도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원문의 대명사 주어와 목적어가 우리말 번역에 되풀이되었다. 이렇게 옮기는 것은 한국어의 리듬에 관계 없이 원문에 나온 낱말을 그대로 옮겨주는 방법이다. 한국인의 운율 감각에는 다음이 더 알기 쉽고 편하다.

“태고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낮에도 마시고 아침에도 마시고 밤에도 마신다/ 마시고 또 마신다”

여기서, 어느 편이 옳고 그르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번역을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태도와 관련된 문제다. 다만 텍스트가 읽는 이를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선택은 분명하다고 본다.

라틴말에서도 주어가 자주 생략되지만 동사의 어미변화에 그것이 이미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말과는 다르다. 우리는 주어를 없애 놓고도 아무 문제 없이 말을 주고받는다. 오히려 꼭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 거추장스럽게 되풀이되는 주어는 우리의 말 느낌을 해쳐서 글의 읽기와 이해를 편치 못하게 만든다.

안-인희/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