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김-수업
우리 모임 공동대표

는개느리

     땅 위의 목숨이 모두 그렇듯이 우리 겨레도 죽살이를 비와 눈에 걸어놓고 있었다. 요즘에는 상점이나 공장이나 회사나 사무실 같이 집안에서 많이 살지만 지난날에는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사시사철 집밖 한데서 눈과 비와 어우러져 살았다. 그만큼 눈비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기에 눈비의 이름도 어지간히 많다.

     비의 이름인 '는개'는 국어사전에도 올라서 꽤 널리 알려진 낱말이다.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풀이해 놓았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자라는 풀이다. '는개'는 “늘어진 안개”라는 어구가 줄어진 낱말임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개가 거미줄처럼 죽 늘어져 있는 것이 '는개'라는 말이다. '는개'는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안개 쪽에다 붙여놓은 이름인 셈인데, '는개'처럼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비라고 하지 않은 것에 '먼지잼'이 또 있다. '먼지잼'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를 땅으로 데려와서 잠재우는 것”이라는 뜻의 풀이를 그대로 줄여 만든 낱말이다. 자연을 이처럼 아름답게 느끼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겨레가 또 어디 있을까!

     '느리'는 국어사전에 오르지도 못한 낱말이다. 농사짓고 고기 잡는 일을 내버려 눈비에서 마음이 떠난 요즘은 들어볼 수도 없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쓰지 않아 잊어버렸나 싶은 낱말이다. 지난겨울 어느 이른 아침 대전에서 수십 년 만에 '느리'를 만나 오래 잊고 살았던 이름을 새삼 떠올렸다. '느리'는 “늘어난 서리”라는 어구를 줄여서 만든 낱말이지만 뜻은 그보다 훨씬 겹겹이다. 모두 잠든 사이에 살짝 오다 그친 '도둑눈'이면서, 마치 '서리'처럼 잘디 잔 '싸락눈'이라, 햇볕이 나면 '서리'가 녹듯이 곧장 녹아버리는 눈이라는 뜻이 함께 겹쳐 쌓여 있다.


실린데:『우리말 우리얼』제51호(2006.10), 32~33쪽. ※ 글쓴이의 허락을 얻어 옮긴 글임.